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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운동, 정치개혁 평생 헌신한 영원한 재야 장기표 선생 별세

기사승인 2024.09.22  15: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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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운동권 대부' 장기표 선생이 22일 오전 향년 78세로 별세했다.

올해 7월 담낭암 4기라는 진단을 받은 장 선생은 이날 오전 1시 35분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눈을 감았다.

고인은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보상금 10억원을 수령하지 않았던 일화로 유명하다. 

유족 등에 따르면 장 원장은 담낭암 투병 끝에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두 달여 전인 지난 7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밝혔다.

고인은 "여러 어려운 사정에서도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고 썼다.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하는 등 1970~80년대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숱한 수감·도망 생활에도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고인은 인터뷰에서 "과거에 민주화운동 유공자 보상을 신청하지 않으셨던데,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좋아서 한 건데, 무슨 보상을 신청하나요? 줘도 안 받는다"고 답변했다.

 

1970년 전태일 사후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만나 시신을 인수하고 서울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데 앞장섰다.

이후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 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2009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이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세상을 떠나던 2011년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족 등에 따르면 장 원장은 담낭암 투병 끝에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고인은 두 달여 전인 지난 7월 1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아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돼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며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밝혔다.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 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다.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하는 등 1970~80년대 수 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했다.

숱한 수감·도망 생활에도 민주화 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 전태일 사후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만나 시신을 인수하고 서울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데 앞장섰다.

이후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 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2009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이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는 세상을 떠나던 2011년 "기표는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실하고 바르게 살려는 첫 사람이자 나에게는 영원한 스승이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0년대부터 재야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떠오른 그는 1984년 10월 문익환 목사를 의장으로 종교인, 변호사, 퇴직 언론인 등이 참여하는 민주통일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립하는 데 기여했다.

이후 국민회의와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의 통합을 이끌어 민주통일민주운동연합(민통련)을 창립했다.

민통련 정책실장으로 있다가 구속된 뒤 1988년 12월 22일 성탄절 특사로 공주교도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해 부인 조무하씨와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를 감싸안은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포착돼 역사처럼 전해지고 있다. 

고인은 공주교도소앞에서 열린 약식 환영회 답사에서 "이번 석방은 선별기만적인 조치"라면서 "양심수전원석방을 위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1990년에는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현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개혁신당, 한국사회민주당, 녹색사민당, 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이어 17·19·21대까지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낙선하며 현실정치 도전에 번번이 실패했다. 

21대 총선에서는 현재 보수정당(현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후보로까지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국민의힘을 탈당해 특권폐지당 창당을 추진하던 중 원외 정당 가락당에 합류해 가락특권폐지당으로 22대 총선에 후보를 냈으나 원내 입성에 실패하고, 세 차례 대선에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했음에도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해왔다.

지난해부터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도 활동하며 국회의원의 면책·불체포특권 폐지, 정당 국고보조금 폐지,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주장했다.

그는 지난해 1월 언론 인터뷰에서 "사람들의 자아실현을 통해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 잠재된 소질과 취향을 실현해야 사람은 행복해진다"면서 "사회적으로 대한민국이 엉망진창이다.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하원, 보원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에 차려질 예정이며, 조문은 오후 2시부터다.

고인은 평생을 민주화 운동과 정치 개혁에 헌신하며 영원한 재야 인사로 추상같은 일침을 던지며 온전한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온전한 재야로 한 시대를 살다 떠나게 됐다.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6일, 장지는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이다.

 

 

 

박상민 press1@news-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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